• 단행본
  • 에세이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 : 작고 여린 생의 반짝임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 : 작고 여린 생의 반짝임이 내게 가르쳐준 것들

저자: 스텔라 황 l 출판사: 동양북스 l 판형: 128x188 l 발행일: 2024.05.30 l ISBN: 979-11-7210-035-3 l 페이지: 240  

 

정가: 16,800원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지만 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_ 장일호 『시사IN』 기자 추천!

『한겨레21』 독자가 선정한 다시 만나고 싶은 필자,
캘리포니아주립대 소아과 교수 스텔라 황의 신생아중환자실 이야기

엄마 배 속에서 나와 집으로 가지 못하는 아기들이 있다. 탄생과 동시에 생사의 경계에 선 아기들은 신생아중환자실로 향한다. 신생아중환자실은 병원에서도 매우 특별한 곳이다. 의료진은 하나같이 환자가 아닌 ‘아기’라는 호칭을 쓰며, 병원에서의 엄마 아빠가 되어 아기들을 보호한다. 아기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거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기에 응급 상황마다 의료진의 고뇌는 더욱 깊을 수밖에 없다. 부모들은 모든 처치를 해서라도 아기를 살리길 바라지만, 이르게 태어난 아기들은 엄지손가락으로 겨우 심폐소생술을 해야 할 만큼 작고 연약하기 때문이다.
생의 기적을 목격하는 동시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곳이 신생아중환자실이다. “환자가 죽어도 살아 있어야 하는, 살아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불면의 밤에 괴로워하면서도 스텔라 황 교수는 어김없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아기 가족의 마음을 보듬으며 애도의 여정을 함께한다. 환자의 몸만 치료하는 의사가 아닌, 환자와 가족의 마음도 치유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 긴 수련을 거쳐 교수가 된 지금도 저자는 여전히 모든 죽음이 힘겹다고 고백한다. 환자의 죽음에 무뎌지지 않고 매번 슬퍼하는 그에게서, 흔들리고, 울고, 차트를 붙들고, 동료들과 토론하며 또 다른 죽음을 막기 위해 분투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뜨거운 희망을 본다.




 저자 소개 

스텔라 황
한국 이름은 황정숙.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천생 문과생이었다.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호스피스 병동에 계신 동안, 수업이 끝나면 마을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열아홉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의사가 되었다. 아픈 아이들이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게 힘을 보태고 싶어 소아과에서 레지던트를, 신생아분과에서 펠로우 수련을 마쳤다. 현재 캘리포니아주립대학병원 소아과 신생아분과 교수로 예비 의사들을 교육하며 연구하는 동시에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엄마의 마음으로 아기를 돌본다. 의사이자 두 아이의 부모,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갑작스레 잃어본 사람으로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기의 가족을 위로하는 데도 마음을 쏟는다. 모든 죽음에 아파하며, 공감과 기록으로 애도의 여정을 함께한다. 『한겨레21』에서 ‘여기는 신생아중환자실’을 연재했고(2022~2023), 신생아중환자실 아기들의 삶과 죽음, 보내줄 수 있는 용기와 연명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책 『사랑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그래도봄, 2023)를 출간했다.




 출판사 리뷰 

“아기가 신생아중환자실에 도착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도착한다.”
환자를 환자라 부르지 않는 유일한 병동, 신생아중환자실

산모들은 아기를 안는 순간, 출산의 고통을 거짓말처럼 잊고 엄마가 됐다는 걸 실감한다고 한다. 그러나 영원히 기억될 아기와의 첫 만남이 모두에게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심각한 질환을 가진 채 태어나거나 예정보다 너무 빨리 태어난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보지도 못한 채 신생아중환자실(NICU)로 가게 된다. 캘리포니아주립대 소아과 교수 스텔라 황은 “아기가 신생아중환자실에 도착하는 순간, 하나의 세계가 도착한다”고 말한다. 신생아중환자실 의료진은 이 세계를 환자가 아닌 ‘아기’라 부른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가, 의료진에게도 특별하고 고유한 존재로 자리하는 것이다.
신생아중환자실 아기들은 혼자 힘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미숙아가 많아 매우 섬세한 케어가 필요하다. 원래라면 안전한 태내에 있어야 했기에, 소음과 빛 등 외부 자극을 최소화해 정상적인 발달을 돕고, 온도와 습도 역시 철저하게 관리한다. 특히 28주 미만의 초미숙아는 몸무게가 채 1킬로그램도 되지 않아 약물을 투여할 때 소수점 단위까지 용량을 맞춰야 한다. 아기가 기기의 도움 없이도 호흡하고 체온을 조절하며 모유(분유)를 먹을 수 있으면 마침내 집으로 갈 수 있다. 저자가 근무하는 신생아중환자실에서는, 작은 몸으로 어려운 고비를 잘 버텨준 아기들에게 퇴원이 아닌 ‘졸업’이란 이름을 헌정한다.

“아기와 함께 온 가족도 우리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기에.”
의사와 보호자에서, 사람 대 사람으로

신생아중환자실을 배경으로 한 이 책에는 환자뿐 아니라 환자의 가족이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많다. 의료진이 치료하는 대상은 아기지만, 아기 가족을 통해 경과를 알리고 치료 방향을 논의하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연명치료를 할지 완화치료로 전향할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가족이 아픈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지만 자식이, 그것도 핏덩이 같은 아기가 아픈 걸 그저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심정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더 이상의 고통 없이 아기를 보내줄 것을 권하는 의사에게 의자를 던지며 위협하다 경비에게 끌려 나간 아기 아빠, 상담을 마친 뒤 의사를 쫓아 나와 차가운 복도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어떻게든 살려달라고 애소하는 부모, 사망 선고 뒤 병실을 다시 찾은 의사에게 아기를 안은 채 심장이 아직 뛰고 있다고 말하는 가족…. 분노, 슬픔, 혼란에 휩싸여 혼란스러워하는 가족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리며, 스텔라 황 교수는 아기 가족도 의료진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존재라고 이야기한다. 치료를 종료하는 것으로 의사의 역할은 끝나지만, 저자는 아기를 잃은 가족 곁에서 함께 눈물을 흘린다. 가족이 병원을 떠난 뒤에도 연락해 안부를 묻는다. 짧은 생을 살다 간 아기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자 어린 나이에 갑작스레 가족을 잃었던 한 사람이 건네는 인간적인 위로다.

“아이가 아프면 모두가 아프다.”
그 누구도 혼자 아프고 혼자 힘들지 않게

이 책은 ‘아픈 아이를 돌볼 의사가 없는 사회에 과연 미래는 있는가’라는 고민에서 기획되었다. 아이 진료를 위해 부모들이 새벽같이 줄을 서고,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소아 환자가 ‘응급실 뺑뺑이’로 목숨을 잃고, 전공의 미달로 소아과가 붕괴 위기에 놓인 현실은 비단 아픈 아이를 둔 부모만이 아닌 전체 사회 구성원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다. 소아과는 번아웃이 일상화된 업무 강도와 현장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행위별 수가제로 인한 낮은 보상, 어느 과보다도 의료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소아과를 선택하고 또 남기로 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는 스텔라 황이라는 한 소아과 의사의 이야기지만 소아과를 지탱하고 있는 모든 의료진들의 이야기기도 하다. 생사의 기로에 선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순수한 헌신,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아이 가족에게 전하는 공감과 위로, 생명의 가치와 존엄한 삶 사이에서의 끝없는 성찰을 담은 이 한 권의 책은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한다. 여전히 환자의 곁을 떠나지 않는 의사가 분명 우리 가까이에 있기에. 그 누구도 혼자 아프고 혼자 힘들지 않도록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의사가.




 추천사 

환자가 아닌 아기가 있다. 퇴원이 아닌 졸업이 있다. 그러나 신생아 병동에서도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다. 죽음은 ‘이겨내지 못한 것’이나 ‘잃은 것’이 아니라 그저 죽음이다. 『나는 죽음 앞에 매번 우는 의사입니다』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마음보다는 몸으로 써 내려간 한 의사의 정직한 실패담이다. 회복에 대한 구체적인 믿음으로 건네는 ‘포옹’이다. 함께 울어주고, 힘껏 안아준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지만, 그렇게 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장일호 『시사IN』 기자, 『슬픔의 방문』 저자




 책 속에서 

상상조차 하기 싫은,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고통을 겪은 후에야, 이런 고통은 어느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심리학과 수업, 신경학과 수업에서 배웠던 고통의 이론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가왔다. 끝이 있는 고통은 그 앎과 동시에 만 배쯤 나아질 수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런데 아기에게 미래를 위한 현재의 고통이 가당키나 할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고, 언어로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아기에게 끝이 없을 것 같은 고통은 얼마나 암담할까. 잠시나마 그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본 뒤 알게 되었다. 끝이 없는 고통에 갇힌 기분을.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고통도 있다는 것을. (33쪽)

외래에서 만나는 아기들은 각자의 향기를 품고 돌아온다. 집에서 쓰는 로션이나 파우더, 아기 용품의 향기를 전한다. 그마저 사랑스럽다. 이런 일상적인 일조차 어떤 아기에게는 죽음을 뚫고 신생아중환자실을 벗어나야만 가능하다. (90쪽)

안타깝게도 의대에서도, 졸업 후 수련을 받을 때도 완화치료에 대해 깊게 배우지 않는다. 주변의 도움이 없거나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환자 인생에서 더없이 중요한 순간에 의사의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환자와 가족에게 꼭 맞는 돌봄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 역시 말기에 완화치료를 제공해 준 성모병원 호스피스 케어 덕분에 아버지와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마지막 장면이 사랑과 숭고함으로 가득 차 버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110~111쪽)

아기에게 든 병원 비용만 200만 달러(약 28억)였다. 부모는 수입이 많지 않아 정부에서 제공한 공공 의료보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따로 지불해야 하는 돈은 없었다. 우리 병원이 정부에서 받은 돈은 실제 비용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내가 내린 결정 하나로 우리 병원에 재정적인 피해를 입힌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나에게 비용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는다. (155쪽)

동료 의사와 나의 목표는 같았다. 아기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마음도. 그럼에도 각자 믿음과 경험에 따라 다른 접근을 했다. 우리의 말 한마디에 부모의 마음은 출렁대기를 반복했다. 차가운 병원 복도에서 무릎을 꿇고 읍소할 만큼 아빠의 마음은 간절했다. 그 아픔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197쪽)

전신마취를 받은 엄마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할머니가 밖에 있다고 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와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너무 분명해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반면 죽음은 정확히 맞은편에 서 있다. 죽음, 그 자체를 증명해야 했다. 다시 살아가야 할 가족을 위해서. 혹시라도 우리의 최선이, 우리의 노력이 작은 위로가 될 수도 있기에. (205~206쪽)

분만실, 수술실,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만나는 아기의 탄생과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어 가슴이 아릴 때가 있다. 생과 사가 딱 붙어 있는 장면을 자주 봐서인지, 그 중간 어디쯤에 서 있는 내 위치를 겸허히 깨닫게 된다. 살아 있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211~212쪽)

아기의 죽음 뒤, 매번 의료진을 모아 ‘침묵의 시간’을 보낸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아 아기의 죽음을 애도한다. 아기의 짧았던 생을 기억하고 우리의 슬픔도 함께 묻는다. 가족이 애도의 과정을 잘 거칠 수 있기를, 아기도 평화롭게 하늘에서 쉬고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212쪽)

한때 카일과 비슷한 상황에서 연명치료를 선택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내 아이라면 욕심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보내주는 것이 더 큰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렇듯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없다. 아이의 상황이 다르고 부모의 믿음이 다르다. 게다가 ‘삶의 질’이라는 건 과연 무슨 의미일까? 누가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 누가 감히 결정할 수 있을까? ‘어려운 삶’이라는 건 ‘보통의 삶’을 사는 우리가 정한 기준일지도 모른다. (229~230쪽)